연재소설

죄인들Chapter 15/ 것지르다

관리자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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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친 게 있다. 그 확신이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평소 자신의 철칙과도 같은 논리가 아닌 충동에 의해서 다다른 곳은 동료 요원 DW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빈 사무실이었다. 죽음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희생자. 치료를 받다 사망한 LO와 CE 역시도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같았으나, 그들은 마지막을 디펜더의 앞에서 맞이하지 않았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디펜더의 손에 죽은 이에게 있어야 할 죽음의 기록. 사건 해결을 더디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깊은 사색을 이어가던 중 갑작스럽게 든 질문 속, 그 불안함과 찝찝함을 해소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울려대는 공간을 둘러보던 H는 벽 앞에 멈춰 섰다. A가 신형 교란기와 카메라를 발견했던 곳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그날의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눈동자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은신과 잠입에는 일가견 있다더니.”


인정할만한 실력이네요. 말을 이어가며 고개를 돌린 시선의 끝엔 잿빛 인영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빛도 어둠도 아닌 그 중간의 색을 가진 덕인지 달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둥 뒤에서 제 존재를 완전히 지운 채 서있던 인영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달빛 아래에 자신을 드러냈다.

잿빛 머리칼을 여전히 길게 늘어뜨린 채였다. 유령처럼 앞으로 나선 D는 유일하게 색채를 지닌 연분홍빛 입술을 움직여 겨울의 그것처럼 쓸쓸한 기운을 품은 목소리를 냈다.


“디펜더도 같아요. 저처럼 은밀하게 숨어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너머에 진실을 숨기죠.”


느리게, 그러나 정확하게 걸어온 D는 방금 전까지 H가 살피던 텅 빈 공간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이라, 실드 전개. 그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푸른빛 장막이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 위를 뒤덮었다. 행동은 빠르게 이어졌다. 빈 공간의 벽을 짚은 손이 천천히 그것을 밀어내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깊이의 공간엔 작은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투명한 상자 안엔 쪽지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받아 든 H는 헛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았어요?”

“간부급과 맞닥뜨린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잔챙이들과는 몇 년 째 계속 싸워왔으니까요.”


저보단 다른 팀원들이…… 더 잘 찾았었죠. 말을 끝마친 D는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함께했던 기억들과 그들을 위한 복수심을 되새긴 눈동자는 그 열망과 반비례하게 점점 더 서늘해졌다.



*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선배 P에게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사 받았단 조금의 배신감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새 약발이 떨어지고만 진통제 때문인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하던 경련은 점점 전신으로 번져갔다. 그 고통이 극에 달할 즈음, 누군가의 호령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장 나가!’


선배!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는 상태였다. 선배……? 스스로 내뱉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선배들 중에서 그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는 없었으니까. 기억이 혼선되어 아카데미 시절 교관의 목소리를 떠올린 건가 생각해봤음에도 동일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다. 가볍게 걸친 티셔츠가 달라붙을 정도로 흐른 땀에 이를 바드득 간 A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체감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이었나, 창 밖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대체 뭘 놓은 거야. 제 핏속에 알 수 없는 약물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자 미간부터 구겨졌다.

목이 텁텁했다. 꼭 매캐한 연기를 집어 삼킨 것처럼, 갈라지다 못해 피비린내까지 올라오는 듯한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침만 연신 삼키던 그는 부어 오른 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다른 임무를 위해 또 시간의 폭풍 어딘가를 살피고 있을 P를 찾는 것은 포기한 상태였다. 대신 원망하려면 H를 원망하라는 그의 말을 따라, 귀라도 간지러우라고 H를 착실히 씹는 중이었다.


‘야, 안지혁.’


그런 그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또다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바로 근거리에서 부른 것처럼 선명하기만 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둘러봤다. 그런 그의 눈은 어느새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이한 느낌에 잠겨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환청이 점점 공포스럽게 느껴질 즈음. 무언가를 깨달은 그가 제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 너머의 자신은 재와 피가 뒤섞여 검게 물들어버린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원 A, 정신이 듭니까? 로스트 내의 사건 대응팀 소속 요원의 목소리와 함께 들어올린 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여기가, 여기가 어딥니까? 멋대로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는 자신의 몰골이 유리 너머에 흐릿하게 비치는 것을 응시하다 시선을 떨어뜨리자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사진들에 담긴 것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약물이 무엇인지 파악한 A는 헛웃음을 흘렸다. 단단히 미쳤구만. 기억 재생 약물이라니. 기억 소거 이후 완전히 잊어버려 결국 해킹해야만 했던 개인 라커의 비밀번호까지 떠오르자 확신을 가진 그는 조용히 주변을 살피다 걸음을 옮겼다. H가 의도한 대로라면, 되찾은 기억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네가 가져간 것.’


쪽지의 내용은 수수께끼였다. 지칭하는 ‘너’가 누구인지도, 그 사람이 가져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 고민만 깊어져 갔다. 최근 며칠의 일은 충격의 연속일 뿐이라, 세세한 것들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지경이었다. 당장 임무 중 끼니를 제때 챙겨 먹은 날도 흐릿하니. 배고프다며 징징거리던 Q의 목소리만 떠올리던 H는 잠시 뒤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내가 가져온 것. 쪽지의 내용을 바꿔 생각하니 무언가 떠올랐다. 그 폐공장에 있었던 수많은 칩들. 그 중에서 가장 뒤의 것을 가져온 것이 번뜩 생각났다. 그걸 어디에 뒀던가. 다급하게 자신의 단말기를 꺼내든 H는 단말기 하단부의 빈 공간을 열어 그 안에 감춰두었던 칩을 꺼내 들었다. D는 차분히 칩을 바라보다 자신이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바로 꺼낸 것은 태블릿 PC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건…….”

“당분간 본부 복귀는 힘들 테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죠. 대답을 이어가면서도 기계를 조립하는 손은 재빨랐다. H는 잠시 시선을 움직여 서류 가방 안을 들여다봤다.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던 타임머신 부분을 전부 제거하고 임무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실용적인 기기들로만 가득 채운 내부엔 다양한 종류의 살상 무기도 구비되어 있었다. 체술, S급. 보기와는 달리 꽤 살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뇌리에 깊숙이 박혀버린 D의 스펙을 떠올리던 H는 D가 조립을 마친 기기가 놓이자 자연스럽게 칩을 연결시켰다.

지독한 수준의 노이즈가 뒤섞여 사람의 형체만 간신히 분간되는 영상 속엔 모든 장면이 담겨 있었다. 제단 같은 곳에 눕혀져 있는 DW와 그 앞에 선 익시온. 이어지는 해부 장면들까지. 간혹 앵글을 당겨 찍은 듯 살아 움직이고 있는 장기들을 비춘다거나 아무런 미동도 없지만 그 두 눈에서만큼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얼굴을 비추는 행위에 절로 이가 갈릴 즈음, 끝날 줄 알았던 영상의 화면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전환되었다.

미간을 구긴 H는 넓은 공터를 찍는 앵글에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왜 이렇게 눈에 익지? 영상이 진행될수록 점점 깊어져 가던 고민의 중간에 갑작스럽게 호출이 끼어들었다. 연락은 Q에게서 온 것이었다.


“잠시 중지시킬까요?”

“아뇨, 계속 틀어놔요.”


H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부착형 인이어를 장착하고 통신을 연결했다.


“무슨 일이야.”

- 선배님, 큰일났어요! 아주 다 뒤집어졌다니까요!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방금 전 수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접한 소식이라며 말문을 튼 Q의 입에서 흐른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바라보고 있던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를 보고 선 두 사람은 의연해 보였으나,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 요원 LO와 CE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어요. 살아있다고 생각하게끔 장치를 해둔 거였다고요!


하지만 어떻게……? 그 충격에 입이 벌어지자 화면 안의 노이즈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제야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원 LO와 요원 CE. 방금 전 정보를 전해들은 두 요원이었다. 얼굴 분별이 가능해지자 가벼운 웃음 소리가 흐르더니, 갑작스럽게 두 요원이 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듯 온몸을 떨었다. 그들의 눈이 돌아가고 입에 문 거품이 붉은빛으로 변해갈 동안, 태블릿에선 기괴할 정도로 기뻐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엔 누군가가 화면 안으로 던져졌다. 쓰러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고 있는 여자는 정신이 없는 듯 바닥만 긁어대다 고개를 들라는 고함에 천천히 카메라 앵글을 응시했다.


-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선배님!


인이어를 통해 귓가에 울리는 Q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영상 속 여자는 DW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H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말이 안 됐다. DM의 사망을 확인하고 증거를 찾기 위해 도착한 폐공장에서 발견된 죽음의 기록 속에서 요원 세 명의 사망 모습이 발견되다니. 순서마저도 인식하고 있던 것과 달리 LO와 CE의 죽음이 DW보다 빨랐다니 사건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말문을 잃었다.


“에이라가 어떻게 알지 못한 거야?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분명이 알아 차렸어야…….”

- 특수 상황이라 지부장님이 장치 정밀 스캔을 건너뛰라고 지시하셨나 봐요.


어떻게든 요원들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이어지는 Q의 말을 듣고 있던 H는 일전에 D가 말했던 KA에 대한 불신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우선 대기해. 10분 뒤에 자료 하나 전송해줄 테니까 분석하고.”

- 예, 기다릴게요.


통신을 종료한 H는 동료들의 죽음 앞에 절규하고 있는 DW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끝난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치밀하고 또 치밀한 놈들이다. 이전에 겪어왔던 디펜더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개입이 의심될 정도의 사건을 어떻게든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애쓰는 H의 뒤로 잠시 물러서 있던 D가 다가섰다. 그런 D의 손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주사기가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