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임무에 뛰어들었을 때 이름을 내려놓을 생각까지 해봤던가? A는 생각을 늘이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답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이라는 것을 단순한 직위로 생각한다면 아니었고, 그것을 목숨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하다 여겼다. 그렇게 그는 항상 극단적이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야 벌어질 일들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원망이나 후회 같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름을 내려놓는다는 건 로스트 요원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또 다른 죽음이었다. 공석으로 남을 이름표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채 스스로 기억 소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자발적이지 않으면 그 끝이 추할 수 밖에 없는 소멸의 시간. 수많은 선배들의 은퇴 과정을 목격했으며 배신자들의 최후 역시 여러 번 본 뒤였다.
가끔 꿈꾼 적은 있었다. 임무 도중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혹은 가족들의 삶에 대한 걱정만을 품은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러워서. 더 큰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마냥 어렸던 시절엔 꿈을 꿨다. 내가 기억하는 지옥들을 다 잊고자 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했다. 마빈 기업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부모가 아닌, 기억 소거 작업 뒤에 인공적으로 심어줄 기억 속 그나마 나은 결말을 맞이할 부모를 가지면 때때로 찾아오는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꿈에서는 금방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선 로스트로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덕이었다.
A는 천천히 에스컬레이터 위에 몸을 올렸다. 이곳까지 오며 스쳐온 다른 사람들처럼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섞여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애를 써야 했다. 애를 쓰지 않으면 녹아 들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삶은 그에게서 멀기만 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문을 열고 나가서 광장을 배회하다 연락이 온 것처럼 핸드폰을 두드리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몇 번이나 반복 했을까, 괜히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껌 하나를 사서 나온 그는 입 안에 퍼지는 민트향을 느끼며 질겅질겅 껌을 씹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가득한 도심 속의 복합 쇼핑몰. 그 속에 자리한 넓은 도서관을 눈으로 훑은 그는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오랜 고민 끝이었다. 신호음은 들리지 않았다. 고민의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가 통화 버튼을 막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댐과 동시에 목소리가 울렸다. 상대방의 목소리엔 조금의 적개심이 섞여 있었다.
- 제정신이냐?
“제정신이면 전화 안 했지.”
- 이제 와서 뭘…….
“만나서 이야기하자.”
나한테 갚을 빚 있잖아. 그의 한 마디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멎었다. 깊은 한숨은 침묵의 뒤를 따라 울렸다. 어딘데. 이어지는 목소리에 A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
으, 기분 나빠. 이제 막 가동되어 기분 나쁜 잡음을 자아내는 귀가 그렇게 거슬릴 수 없었다. 귀 안에 삽입한 기계 장치가 부서질 때 자연 청신경 일부가 함께 손상되어 부품을 추가한 탓이었다. 내 몸의 일부를 더 잃었다. 그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붙는 불쾌감에 괜히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불만을 품은 채 걷던 Q는 잠시 뒤 제 방에 들어가자 울리는 단말기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갑자기 일이 생겼어. 자료는 나중에 보낼게, 쉬어.’
H에게서 온 문자였다. 별다른 덧붙임 없이 간단하게 끝나는 문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평소보다 더 딱딱해지신 것 같긴 한데 뭐, 피곤하신가 보네. 홀로 결론을 내린 그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잡음은 멎었지만 이번엔 다른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근처 숙소에 누군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찾아가 항의라도 했겠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베개로 귀를 덮어버렸다. 피로는 한꺼번에 그의 몸을 덮쳐왔다.
*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거대한 복합 쇼핑몰 안에 카페가 절반 이상이 넘어가는데도 자리는 항상 부족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자리가 남은 카페도 겨우 찾은 것이었다. A는 구석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였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괜한 가십거리도 살펴보고 주변 구경도 하던 그는 마침내 제 앞에 다가와 테이블을 두드리는 한 중년 남성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었네.”
“호칭 정리 좀 하지, 듣는 귀들이 있는데.”
“요새 애들이 그런 거 보고 뭐라 그러더라. 꼰대?”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라는 거야.”
자리에 앉은 남자는 더 이상 들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 헌팅캡을 더 푹 눌러썼다. 그의 시선은 주변을 불안하게 살폈다. 무언가에 뒤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자리 자체가 불편한 듯 몸까지 들썩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던 A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미행 안 붙었으니까.”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흘린 중년의 남자는 음료를 한 모금 삼켰다. 그 뒤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은 A가 기억을 잃기 전 알고 있었던 그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훈련을 받았다 해도, 로스트의 요원들 역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기 위해 델모칩을 통해 세뇌하는 디펜더의 요원들과 로스트의 요원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그것이었다.
감정. 그 치명적인 약점에 무너지는 요원들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 임무에 복귀했고, 감정에 의해 요동쳤던 기억은 경험이 되어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감정에 지배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아내랑 아이들은 잘 지내?”
사랑이란 감정에 붙잡힌 요원들이었다. 매 해 다섯 명씩은 나온다는 이탈자는 임무 중 만난 특정 시간대의 일반인을 잊지 못해 스스로 요원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간대에 묶이길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A의 앞에 앉아있는 선운도 그 중 하나였다. 한 때 뛰어난 수색 요원이었던 그는 30년 전의 시간대에서 만난 여인을 포기하지 못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주변의 모든 요원들이 말렸지만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아이까지 가져버린 여인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으나 30년 전의 시간대를 선택한 그의 모습은 세월을 그대로 받아낸 모습이었다. 다른 이탈자들과 별다르지 않게 자연스럽게 늙어가며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으나,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탈자들은 필수적으로 기억 소거를 받았다. 한 때 A가 꿈꿨었던 그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스스로의 이름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 그 뒤엔 스스로 묶일 시간대에 대한 정보를 주입 받고, 마지막 호의로 준비해 준 새로운 신분 역시도 주입 받았다. 그렇게 로스트를 완전히 잊어버린 이들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이 가장 바라던 것들을 이루고 살았다. 의도적으로 그들이 역사를 바꾸지 못하게 장치해두었으나, 이름만 널리 알리지 못할 뿐 삶은 어느 정도 풍족하게 영위되었다.
“잘 지내지, 덕분에.”
그런 그들과 달리 선운은 기억 소거를 받지 않은. 아니, 정확히는 아주 좁은 범위의 기억 소거만 받은 케이스였다. 어린 시절 A의 흐린 판단력과 가공할만한 수준의 연민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몇 년 전, 자신의 직속 후임이 찾아와 이탈자가 되고 싶다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A는 자신보다 어렸던 그 때의 얼굴을 떠올리다 그 피부 위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앞의 얼굴을 잠시 살펴봤다. 원칙 상 전체 기억을 소거해야 함이 맞았으나, 이미 너무 많은 추억을 나눠 다 잊을 수는 없다 간절히 애원하던 후임을 위해 그는 간단한 조작을 했다. 기억 소거기의 소거 수준을 능력에 한정 지어 실행했고, 결과적으로 선운은 선배의 지시를 따라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 받은 척 행세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능력만 제한되었을 뿐 다른 것은 제한 받지 않아 직업 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소거 받은 기억이 재생되고 있어.”
이야기를 들은 선운은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A의 사고와 기억 소거는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었다. 임무 중에 시간이 나면 가끔 전화하고는 했으니까. 기억을 지우기 전 기운이 다 빠져 웅얼거리듯 이어가던 전화를 받은 것도 그였다. 이 전화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차분하게 말하던 A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온 전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의심만하던 것이 확실시되자 착잡함부터 느껴졌다. 적발되면 나란히 끌려가 재소거를 받을 운명의 두 사람이라니. 생각할수록 환상적인 조합에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 웃던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소리 죽여 말했다.
“강제 재생되는 중이니 머릿속이 아주 엉망진창이겠지. 날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일거고.”
“그냥 기억만 순서대로 잘 짜맞춰주면 돼.”
이 와중에도 아주 중구난방으로 떠오르고 있어서 죽겠으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리키는 A의 모습에 선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무의 시작부터 바로 잡아야지.”
“근데 그건 단독 임무였다는 사실 빼고는 기억이 잘 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운은 미간을 구긴 채 A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A는 괜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대답했다.
“단독 임무가 아니었나?”
“대체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하지만 그건 분명히 단독 임무였는데. 기억을 떠올려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팔을 두드린 선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는 듯 고갯짓하는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A의 눈엔 혼란이 가득했다.
*
Q는 비척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자세를 잘못 잡아 몸이 구겨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낑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본능적으로 제 단말기를 한 번 확인하고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잠시 뒤의 일이었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멍하니 굳어 있던 그는 다시 한 번 단말기의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그의 단말기엔 간략한 단어가 몇 개 떠올라 있었다.
[ 사건 현장 접근 감지 : 요원 H ]
이 임무에 뛰어들었을 때 이름을 내려놓을 생각까지 해봤던가? A는 생각을 늘이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답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이라는 것을 단순한 직위로 생각한다면 아니었고, 그것을 목숨이라 생각한다면 당연하다 여겼다. 그렇게 그는 항상 극단적이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야 벌어질 일들에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원망이나 후회 같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름을 내려놓는다는 건 로스트 요원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또 다른 죽음이었다. 공석으로 남을 이름표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채 스스로 기억 소거기에 들어가야 하는, 자발적이지 않으면 그 끝이 추할 수 밖에 없는 소멸의 시간. 수많은 선배들의 은퇴 과정을 목격했으며 배신자들의 최후 역시 여러 번 본 뒤였다.
가끔 꿈꾼 적은 있었다. 임무 도중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혹은 가족들의 삶에 대한 걱정만을 품은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러워서. 더 큰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마냥 어렸던 시절엔 꿈을 꿨다. 내가 기억하는 지옥들을 다 잊고자 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했다. 마빈 기업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을 맞이한 부모가 아닌, 기억 소거 작업 뒤에 인공적으로 심어줄 기억 속 그나마 나은 결말을 맞이할 부모를 가지면 때때로 찾아오는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꿈에서는 금방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꿈을 지키기 위해선 로스트로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덕이었다.
A는 천천히 에스컬레이터 위에 몸을 올렸다. 이곳까지 오며 스쳐온 다른 사람들처럼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섞여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애를 써야 했다. 애를 쓰지 않으면 녹아 들기 힘들 정도로 평범한 삶은 그에게서 멀기만 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문을 열고 나가서 광장을 배회하다 연락이 온 것처럼 핸드폰을 두드리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길 몇 번이나 반복 했을까, 괜히 눈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껌 하나를 사서 나온 그는 입 안에 퍼지는 민트향을 느끼며 질겅질겅 껌을 씹었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가득한 도심 속의 복합 쇼핑몰. 그 속에 자리한 넓은 도서관을 눈으로 훑은 그는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오랜 고민 끝이었다. 신호음은 들리지 않았다. 고민의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가 통화 버튼을 막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댐과 동시에 목소리가 울렸다. 상대방의 목소리엔 조금의 적개심이 섞여 있었다.
- 제정신이냐?
“제정신이면 전화 안 했지.”
- 이제 와서 뭘…….
“만나서 이야기하자.”
나한테 갚을 빚 있잖아. 그의 한 마디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멎었다. 깊은 한숨은 침묵의 뒤를 따라 울렸다. 어딘데. 이어지는 목소리에 A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
으, 기분 나빠. 이제 막 가동되어 기분 나쁜 잡음을 자아내는 귀가 그렇게 거슬릴 수 없었다. 귀 안에 삽입한 기계 장치가 부서질 때 자연 청신경 일부가 함께 손상되어 부품을 추가한 탓이었다. 내 몸의 일부를 더 잃었다. 그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붙는 불쾌감에 괜히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불만을 품은 채 걷던 Q는 잠시 뒤 제 방에 들어가자 울리는 단말기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갑자기 일이 생겼어. 자료는 나중에 보낼게, 쉬어.’
H에게서 온 문자였다. 별다른 덧붙임 없이 간단하게 끝나는 문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평소보다 더 딱딱해지신 것 같긴 한데 뭐, 피곤하신가 보네. 홀로 결론을 내린 그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잡음은 멎었지만 이번엔 다른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근처 숙소에 누군가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찾아가 항의라도 했겠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베개로 귀를 덮어버렸다. 피로는 한꺼번에 그의 몸을 덮쳐왔다.
*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거대한 복합 쇼핑몰 안에 카페가 절반 이상이 넘어가는데도 자리는 항상 부족했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자리가 남은 카페도 겨우 찾은 것이었다. A는 구석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였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괜한 가십거리도 살펴보고 주변 구경도 하던 그는 마침내 제 앞에 다가와 테이블을 두드리는 한 중년 남성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었네.”
“호칭 정리 좀 하지, 듣는 귀들이 있는데.”
“요새 애들이 그런 거 보고 뭐라 그러더라. 꼰대?”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라는 거야.”
자리에 앉은 남자는 더 이상 들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 헌팅캡을 더 푹 눌러썼다. 그의 시선은 주변을 불안하게 살폈다. 무언가에 뒤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자리 자체가 불편한 듯 몸까지 들썩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던 A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미행 안 붙었으니까.”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아무렇지 않게 말을 흘린 중년의 남자는 음료를 한 모금 삼켰다. 그 뒤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은 A가 기억을 잃기 전 알고 있었던 그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훈련을 받았다 해도, 로스트의 요원들 역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기 위해 델모칩을 통해 세뇌하는 디펜더의 요원들과 로스트의 요원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그것이었다.
감정. 그 치명적인 약점에 무너지는 요원들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 임무에 복귀했고, 감정에 의해 요동쳤던 기억은 경험이 되어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감정에 지배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아내랑 아이들은 잘 지내?”
사랑이란 감정에 붙잡힌 요원들이었다. 매 해 다섯 명씩은 나온다는 이탈자는 임무 중 만난 특정 시간대의 일반인을 잊지 못해 스스로 요원직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간대에 묶이길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A의 앞에 앉아있는 선운도 그 중 하나였다. 한 때 뛰어난 수색 요원이었던 그는 30년 전의 시간대에서 만난 여인을 포기하지 못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주변의 모든 요원들이 말렸지만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아이까지 가져버린 여인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으나 30년 전의 시간대를 선택한 그의 모습은 세월을 그대로 받아낸 모습이었다. 다른 이탈자들과 별다르지 않게 자연스럽게 늙어가며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으나,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탈자들은 필수적으로 기억 소거를 받았다. 한 때 A가 꿈꿨었던 그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스스로의 이름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과정. 그 뒤엔 스스로 묶일 시간대에 대한 정보를 주입 받고, 마지막 호의로 준비해 준 새로운 신분 역시도 주입 받았다. 그렇게 로스트를 완전히 잊어버린 이들은 우연을 가장해 자신이 가장 바라던 것들을 이루고 살았다. 의도적으로 그들이 역사를 바꾸지 못하게 장치해두었으나, 이름만 널리 알리지 못할 뿐 삶은 어느 정도 풍족하게 영위되었다.
“잘 지내지, 덕분에.”
그런 그들과 달리 선운은 기억 소거를 받지 않은. 아니, 정확히는 아주 좁은 범위의 기억 소거만 받은 케이스였다. 어린 시절 A의 흐린 판단력과 가공할만한 수준의 연민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몇 년 전, 자신의 직속 후임이 찾아와 이탈자가 되고 싶다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A는 자신보다 어렸던 그 때의 얼굴을 떠올리다 그 피부 위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앞의 얼굴을 잠시 살펴봤다. 원칙 상 전체 기억을 소거해야 함이 맞았으나, 이미 너무 많은 추억을 나눠 다 잊을 수는 없다 간절히 애원하던 후임을 위해 그는 간단한 조작을 했다. 기억 소거기의 소거 수준을 능력에 한정 지어 실행했고, 결과적으로 선운은 선배의 지시를 따라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 받은 척 행세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능력만 제한되었을 뿐 다른 것은 제한 받지 않아 직업 군인으로서의 삶도 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소거 받은 기억이 재생되고 있어.”
이야기를 들은 선운은 난감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A의 사고와 기억 소거는 어렴풋이 아는 사실이었다. 임무 중에 시간이 나면 가끔 전화하고는 했으니까. 기억을 지우기 전 기운이 다 빠져 웅얼거리듯 이어가던 전화를 받은 것도 그였다. 이 전화가 마지막이 될 거라고. 차분하게 말하던 A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온 전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의심만하던 것이 확실시되자 착잡함부터 느껴졌다. 적발되면 나란히 끌려가 재소거를 받을 운명의 두 사람이라니. 생각할수록 환상적인 조합에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 웃던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소리 죽여 말했다.
“강제 재생되는 중이니 머릿속이 아주 엉망진창이겠지. 날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일거고.”
“그냥 기억만 순서대로 잘 짜맞춰주면 돼.”
이 와중에도 아주 중구난방으로 떠오르고 있어서 죽겠으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리키는 A의 모습에 선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무의 시작부터 바로 잡아야지.”
“근데 그건 단독 임무였다는 사실 빼고는 기억이 잘 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선운은 미간을 구긴 채 A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 당황한 A는 괜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대답했다.
“단독 임무가 아니었나?”
“대체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하지만 그건 분명히 단독 임무였는데. 기억을 떠올려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팔을 두드린 선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는 듯 고갯짓하는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A의 눈엔 혼란이 가득했다.
*
Q는 비척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자세를 잘못 잡아 몸이 구겨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낑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본능적으로 제 단말기를 한 번 확인하고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잠시 뒤의 일이었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멍하니 굳어 있던 그는 다시 한 번 단말기의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그의 단말기엔 간략한 단어가 몇 개 떠올라 있었다.
[ 사건 현장 접근 감지 : 요원 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