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죄인들Chapter 17/ 가위질

관리자
2021-04-16
조회수 294



잿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단 한 올도 선을 벗어나지 않게 칼 같이 길이를 다듬은 머리칼은 어깨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잘라낸 제 머리칼을 쥔 손은 은사와도 같아 보이는 그것들을 머뭇거림 없이 허공에 뿌렸다. 춤을 추며 바닥 위에 내려앉은 머리칼들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잿빛 눈동자는 그것들을 무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누군가 했더니.”


목소리는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이었음에도 놀란 기색 없이 돌린 잿빛 시선의 끝에는 검은 가면을 뒤집어 쓴 탄탈로스가 서있었다.


“도망친 물고기 아니야 이거?”


D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탄탈로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던 탄탈로스는 불에 익어 퇴색된 눈동자를 내렸다. 그의 시선은 D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은 어디다 두고 온 건지, 습기를 머금은 흙을 짓밟고 있는 맨발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가득 묻어있었다.


“내 장난감들을 건드린 건가?”

“장난감들이어서 그렇게 허술했나 보네.”


재미 없었어. 나직이 말을 흘린 D는 머리칼이 내려앉은 땅 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몇 명일까? 그 물음에 탄탈로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인으로 디펜더를 도발하는 로스트 요원이라…… 지금 나랑 내기하자는 건가? 웃음기 섞어 흘린 말에 대한 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고요한 공기 중에 기괴한 웃음 소리만 연달아 울릴 뿐이었다.

한참을 웃던 탄탈로스는 곧 얼굴을 굳히고 허공에 무언가를 내던졌다. 작은 소형 폭탄처럼 생긴 그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을 내며 터졌고, 그와 동시에 자리에 서있던 D의 형상과 머리카락들이 글리치를 일으키다 사라졌다. D가 서있던 자리에는 고장 난 홀로그램 기기만이 남아있었다.


“물고기 주제에 어딜.”


이를 갈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는 방금 전까지 은빛 머리칼이 그 위를 덮고 있던 흙 위를 발끝으로 살짝 치워냈다. 검은 흙 사이에선 생기를 잃은 누군가의 손이 드러났다. 꽤 격렬한 전투였는지 뒤틀리고 부러져 뼈가 드러나 있는 그것들을 내려다보던 탄탈로스는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에서 통신 기기를 빼낸 D는 아무런 가구도 없는 방 안을 아주 느리게 걸어 다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말라 붙은 피들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거친 콘크리트의 감촉과 서늘함을 제 피부로 온전히 받아내며 걷던 D는 잠시 뒤 소매 속에서 소형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지손가락과 엇비슷한 길이의 그것 안에는 푸른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달빛을 받아 더욱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그 빛깔을 응시하던 눈동자는 곧 의자 위에 묶여 있는 누군가에게 향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견고한 정적 속에 옷의 마찰음이 울렸다. 단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도 귀에 거슬리게 들려오는 소음엔 어쩐지 기괴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거대한 폭발음처럼 들리는 마찰음이라니. 그 모순된 점 때문에 서늘한 기운을 한껏 배가 시키는 공기를 가른 손은 고개를 축 늘이고 있어 훤히 드러나있는 뒷목에 약물을 주사했다.

약물이 전부 주입되자 바로 반응이 이어졌다. 조금 움찔거리던 몸은 잠시 뒤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상황 파악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먼저 주사되었던 약물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굳게 닫힌 입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D는 별다른 설명 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분노로 가득 찬 H의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


가위질 된 기억은 수십, 수백 개의 조각이 되어 찾아왔다. 가만히 가라앉아만 있지는 않은 것들이라,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그것들을 잡기도 힘들었다. 언젠가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 그것을 자세히 파헤치고자 하면 임무 중에 발견했던 시신의 상처가 떠올랐고, 특정 임무를 떠올리고자 할 때면 예전에 스치듯 지나갔던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기억이 순차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떠오른 기억도 다시 잊게 되고?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묻는 선운의 질문에 A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시간으로는 30년이나 지나버린 지금, 로스트에서 일할 당시 배웠던 것들을 전부 떠올리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으나, 중요한 몇 가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기억 소거의 부작용이었다. 기억 소거를 받기 전 건네 받았던 매뉴얼의 모든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던 그는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있던 주의점을 떠올렸다. 기억 소거를 여러 번 받으면 차후 기억을 되살릴 때 중구난방으로 기억이 재생되는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고.


“하지만 분명히 한 번 받았어.”

“그 분명하다는 말, 기억 소거 앞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거 알지?”

“아니 다들 그렇게 기억하고 있기도 해. 한두 명이면 그렇다 쳐도 이건 여러 명이잖아.”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


그 사람이 그렇게 완전히 잊혀질 만한 사람은 아닌데.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어지는 선운의 말에 답답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A는 선운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의 의견을 따라 그가 가끔 들러서 자고 가는 별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도 두 시간 째였다. 그가 말하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해 이젠 칭얼거리기까지 하는 A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선운은 잠시 뒤 나직이 말을 흘렸다.


“요원 X. 네 직속 사수 말이야.”


A는 미간을 구겼다. X라면 50년 전에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멋있어서 차지하려 했었으나 그 사실에 좌절하고 A라는 이름을 골랐었는데, X라는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니. 그것도 제 직속 사수로.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굳어 있던 그는 잠시 뒤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그건 네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소거로는 지워질 수 없을 법한 사실을 떠올리던 그는 그렇게 말을 하려다 순간 제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숨을 집어 삼켰다.


*


온통 엉망진창이구만 정말. 소매를 걷으며 빠르게 걷던 Q는 상황실 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다가오는 두 명의 경호 요원들에게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검은 카드 한 장을 들어 보여줬다. 두 요원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먼저 앞장 서 걸어갔다. 위급 상황입니다.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Q 대신 상황실 중앙의 메인 컴퓨터에 앉은 요원들을 물린 그들은 Q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부에 알리지 말고 우리 선에서 끝내라뇨. H의 실종 의심 사실과 갑작스러운 A의 연락두절을 지부장 KA에게 알린 Q는 이어지는 대답에 저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반문을 이어갔다. KA는 그런 Q의 태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할 일을 하라는 듯 시스템 접근 권한을 상승시켜주는 카드를 한 장 건넸을 뿐이었다.

우리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 같으면 애초에 찾아가지도 않았지. 속으로 투덜거림을 늘어 놓으며 자리에 앉은 Q는 곧장 카드를 메인 컴퓨터에 꽂았다.


/ 상급 요원 추적 권한 부여, 요원 Q. 입력된 대상, 요원 H, 요원 A. 추적을 시작합니다.


에이라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상황실 스크린엔 아시아 지부가 위치한 대한민국 전역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적 중. 몇 번 깜빡이던 글씨는 곧 붉은 글씨를 출력했다. 추적 불가. 예상보다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 결과값에 상황실에 남아 있던 요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에이라의 추적 시스템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특히 로스트 요원들에게 있어서는. 에이라의 시스템이 적용되는 아주 작은 물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바로 위치를 감지할 수 있도록 했고, 각 요원들의 요원증에도 안전을 위한 추적 칩을 넣어둔 상태였다. 그랬으니 그런 그들을 감지할 수 없다는 건 그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완전하게 모든 것을 무력화 시켰다는 이야기였다.

Q는 잠시 머리를 쥐어 뜯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다시 급히 달려갔다. 목적지를 명확하게 정한 듯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붉은색 칩이 들려 있었다.


*


나에게 직속 사수가 있었다고? A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모두들 모르는 것 같았다. 기억 속 자신은 분명 직속 사수조차 배정받지 못한 하급 요원 중 하나였을 뿐이었고, 그나마 관심을 가져주던 선배 요원들의 이름도 선운의 입에서 나온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왜 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까.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물음을 해결하지 못한 그는 이어지는 선운의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요원 X. 정보국 소속 상급 요원. 고정 발령지가 아시아 지부였고, 그래서 이쪽 지부에 대해선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어.”


들리는 소문엔…… 지부장 KA와 아카데미 동기라고 그랬었고. 선운이 직접 화이트 보드 위에 프로필을 써가며 설명을 하는 데도 A는 기시감 조차 느끼지 못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기억이 재생되는 약물이 주사된 상태에서도 떠오르지 않는 인물이라니. 나중엔 선운이 없는 사람을 꾸며내는 게 아닌가 싶어 의심까지 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트 요원이던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물품들을 뒤적여 사진 하나를 꺼내 온 선운의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이건 분명히 나인데…….”


오래된 사진 속엔 어린 시절의 A와 이름 모를 중년의 남자가 어깨동무를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중년 남성의 수트에 명확하게 새겨져 있는 이름, X까지. A는 깨질 것처럼 아파오는 머리를 쥔 채 고통을 억눌렀다.


“기억이 안 나,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고.”

“어쩌다 목소리가 한 번씩 들리기는 하잖아.”

“그것뿐이야. 다른 그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아.”


선운은 고통스러워하는 A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이건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고, 해서도 안 되는 생각이긴 한데…….”

“뭔데.”

“모든 사람들이 요원 X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면 혹시…….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끝을 늘이는 선운의 얼굴을 조금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A는 얼마 지나지 않아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고개를 저었다. 로스트 조직 내에 전체적으로 기억 소거가 이루어졌다면? 그래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의 존재가 완벽하게 지워진 거라면? 생각이 그곳에 닿자 그는 숨을 집어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로스트 내의 반역 조항에 들어갈 감이었다.

상부를 의심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적이 나타난 이 때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애써 방금 든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젓던 그의 코끝에 별안간 매캐한 연기 냄새가 느껴졌다. 스치듯 지나간 냄새는 그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어디 가? 선운이 따라서 일어나 외치는 소리에 A는 나직이 목소리를 흘렸다. 가야 할 곳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