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안지혁.”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제 이름은 이제부터 A라고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진짜. 짜증스럽게 따라붙는 목소리에도 웃음은 호쾌하게 터져 나왔다. 솥뚜껑 같은 손이 넓은 등 한가운데를 정확히 찰싹 내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A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주변을 지나던 요원 몇이 그 꼴을 보고 애써 웃음을 감추는 것을 본 그는 더 성이 나서 소리쳤다.
“저 놀리려고 요원 하십니까?”
“그래 인마. 그러려고 상부 차출도 포기하고 여기 남았다. 왜.”
손수 기계를 수리하다 왔는지 흰 소매에 기름때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것을 개의치 않는 듯 팔에 걸쳐 두었던 자켓을 입자 그의 이름표가 조명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국 상급 요원, X. 다른 요원들의 것과는 달리, 10년 이상 로스트의 요원으로서 살아 남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금테가 둘러진 이름표를 가만히 바라보던 A는 고개를 저으며 읽고 있던 자료에 시선을 뒀다.
“이번 사건 자료인가?”
관심이 있는 듯 슬쩍 보다가 말도 없이 자료를 빼앗아 가버리는. 뻔뻔한 얼굴을 한 채 자료를 읽고 있는 제 사수를 멍하니 보던 그는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계속 말을 얹어봐야 제 입만 아팠다. 아무리 대꾸를 하고 반박을 해봐도 연차라는 게 뭐라고, 금방 말려서 당해버리니. 이젠 그 의지를 잃어 금방 포기해버리는 A를 슬쩍 보던 X는 목을 울려 웃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네가 보기에 이번 사건, 어떤 것 같아?”
“웬일이십니까? 제 의견도 다 물어봐 주시고.”
“이건 뭐 물어봐 줘도 불만이네. 그냥 갈까?”
“아니…… 아닙니다.”
조금 당황해 손을 젓던 A는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갑작스러운 브리핑 요구에 머뭇거리긴 했으나, 말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제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디펜더 놈들 소행인 것 같습니다.”
“확신 없는 건 보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뇨, 확신합니다. 맞습니다. 디펜더입니다.”
“이유는?”
그는 X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인적으로 준비해뒀던 자료들을 나열했다. 기회를 주니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은 X는 자리에 앉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더 높인 A는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들까지 정리한 파일들을 스크린 위에 정리했다.
*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온몸이 뜨거운 용광로 어딘가에 내던져진 것처럼 뜨거웠다. 후각은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내가 지금 맡고 있는 냄새가 무엇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든 그을음이 그 감각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두 다리는 멀쩡했으나 한 쪽 팔이 말썽이었다. 어깨가 빠진 건지, 아니면 아예 뒤로 돌아가버린 건지. 감각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 팔은 포기하고 크게 소리를 쳤다.
“선배님!”
악을 쓰듯 외쳤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선 무언가 타 들어 가는 소리와 무너져가는 소리만이 가득 울렸다. 어떡하지,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극한의 생존 훈련 중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잠시 방황하는 사이. A는 흐려졌던 기억을 겨우 떠올렸다.
누군가의 초대장을 받고 폐공장을 찾았다. A의 주도로 사건을 파헤치는 중이었고, 그 편지는 이름 모를 인편을 통해 X에게 전달되었다. 필요한 모든 진실을 알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간결한 문장이었다. 함정이겠죠, 당연히. 흰 편지지를 내려놓으며 말하는 소리에 X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달리 과묵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잠시 뒤에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다. 그래야 뭔가 해결될 거야. 그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그래서 폐공장으로 향했고, 모든 방향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진입했다. 무기는 물론이고 비상 호출망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무슨 상황이 생기더라도 서로는 꼭 챙겨야 한다. X의 당부를 마음 속에 새기며 진입한 A는 총으로 정면을 겨누며 전진했다.
가동을 멈춘 기계들 사이엔 누군가 서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미간을 구기고 있으니, 신원을 밝히라는 X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순순히 로브를 벗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확인한 A는 잠시 뒤 눈을 크게 떴다.
“어?”
“아는 사이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훈련생일 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실격자’라는 이름을 단 채 아카데미에서 제명되었다는 것을.
사실 아카데미 시험 중 여러 문제로 탈락되는 인물 중 일부가 디펜더로 흡수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그들을 언론 전면에 내세우며 압박의 도구로 쓰던 마빈 기업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암살 집단에까지 스카우트 해가다니. 지금은 다른 지부에서 임무를 소행하고 있을 H가 듣는다면 격노를 할 만한 사실을 X에게 전달한 A는 호출기의 신호를 긴급으로 돌렸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아 신호가 가고 있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로스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물인 만큼 대비는 철저해야 했다.
“축하해. 날 밟고 이름을 달았네.”
“말은 똑바로 하지 그래. 그때 네가 내 머리를 부순 덕에 이름을 단 거지.”
“그렇긴 하네. 내 덕인데 한 턱 쏘지 그래?”
“머리에 한 발 쏴줄 의향은 있다. 지금 쏴줄까?”
지지 않고 신경전을 이어가는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 건 X의 목소리였다. 영양가 없는 싸움은 그만 두고. 정보는 어디에 있지? X의 말에 사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X를 응시했다. 그를 바라보는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진실을 밝히면. 누구 하나는 분명히 죽어나갈 텐데 상관 없나?”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예? 무슨 소리십니까, 원하는 거라뇨. 이건 거래가 아니라……. A가 이어가는 말은 X가 고개를 저어 막았다. A의 말이 맞았다. 계획과는 달랐다. 강제 진압을 해서라도 정보를 얻어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거래라니. 갑자기 왜? 머릿속에 늘어가는 의문에 A가 조금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그것을 알아챈 사내는 나직이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뭔지 파악하려는 모양이군. 찔리는 게 많으신가 봐.”
“계속 헛소리 해대면 죽일 줄 알아.”
“죽여보시지 그래. 날 죽인다 해도 진실은 살아 남아서 언젠가 네놈의 숨통을 조일 테니.”
X는 거침 없이 사내의 발 앞에 한 발을 사격했다. 입 다물어! 이어진 호통에 커진 건 A의 눈이었다. 선배님? 나직이 흐른 말에 X는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쩐지 조금은 서늘해진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이제 모든 일이 시작될 예정이니, 일단 내 소개부터 할까?”
앞으로 질리게 볼 사이일 테니까. 그가 한 손을 들자 근거리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공장 내는 물론이고 바닥까지 울릴 정도로 큰 폭발음은 공장의 뒤편에서 들려온 것이었고, 순식간에 건물 주변으로 강렬한 화염이 일었다. 이건 아케론님의 부탁으로 플레게톤님이 특별히 하사하신 축복이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A는 재빠르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호출 완료, 안전을 위해 GPS 신호를 유지하며 현장에서 벗어나십시오. 1차적으로 신호가 갔다는 에이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 일을 지체해선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그가 권총의 잠금을 해제하자 옆에서 탄창을 빼내는 소리가 울렸다.
“내 이름은 탄탈로스.”
‘죄인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새로운 조직의 요원이지. 사내의 자기 소개 소리는 듣고 넘겨버린 A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서, 제 총의 탄창을 분리해 바닥에 내던지는 X를 발견했다.
“선배, 지금 이게 무슨…….”
“마르코스님의 명령으로, 이제부터 공들여 네놈들을 괴롭힐 거다.”
어차피 지워질 기억. 이왕이면 화끈하게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탄탈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X는 진압봉을 빼 들고 정면으로 달려갔다. 선배님! 외치는 소리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탄탈로스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X를 무던하게 지켜봤다. 그러다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발은 X를 집어 삼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다 화염에 집어 삼켜진 선배를 따라 달려가던 A는 그 여파에 의해 밀려나 크게 넘어졌다.
직접적으로 머리를 부딪혀 아득해지는 시선으로 본 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탄탈로스에게 달려드는 X의 모습이었다. 이미 녹아가고 있는 얼굴엔 이성의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얽힌 두 사람의 몸이 함께 불타는 것을 본 것이 당장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빌어먹을! 크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A는 한참 동안 혼란스러움을 거두지 못해 방황하다 생존 본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온통 불바다라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나 검은 연기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괜찮은 쪽 팔을 들어 소매로 입을 가리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너 이 새끼!”
잠시 뒤에 그를 덮친 건 녹아버린 손이었다. 불에 익어 수포가 가득 올라온. 그 수포가 터지다 못해 살이 녹아 뼈까지 일부 드러나 있는 손이 어깨를 잡아채자 A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몸을 털어냈다. 흐린 시선으로 확인한 건 이미 절반이나 녹아버린 탄탈로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복수심으로 마지막 힘을 끌어내 전투를 이어갔다. 탄탈로스가 살아있다는 건 X가 실패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성치 않은 몸으로 제 손에 묻어나는 탄탈로스의 진물과 피부를 대충 털어내며 전투를 이어갔다. 다행히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팔 부상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멀쩡한 그를 전신 화상을 입은 탄탈로스가 이겨낼 리가 없었다. 빼든 진압봉으로 물러진 머리를 반쯤 부숴 복수를 한 A에 의해 다시 불구덩이로 밀려나기 전, 기괴하게 웃은 탄탈로스는 다 쉬어빠진 소리로 말했다.
“보이는 것만 믿지 마, 너희도 우리와 다를 바 없으니까.”
A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다 기어서 그곳을 겨우 탈출했다. 탈출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계속해서 X의 흔적을 찾았으나 보이는 것이 없었다.
흙바닥 위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 쉰 그는 화마에 집어 삼켜져 무너져가는 공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흐려져가는 의식 너머로 들리는 지원 요원들의 소리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으며 그렇게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이, 안지혁.”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제 이름은 이제부터 A라고 몇 번을 말씀 드립니까 진짜. 짜증스럽게 따라붙는 목소리에도 웃음은 호쾌하게 터져 나왔다. 솥뚜껑 같은 손이 넓은 등 한가운데를 정확히 찰싹 내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A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주변을 지나던 요원 몇이 그 꼴을 보고 애써 웃음을 감추는 것을 본 그는 더 성이 나서 소리쳤다.
“저 놀리려고 요원 하십니까?”
“그래 인마. 그러려고 상부 차출도 포기하고 여기 남았다. 왜.”
손수 기계를 수리하다 왔는지 흰 소매에 기름때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것을 개의치 않는 듯 팔에 걸쳐 두었던 자켓을 입자 그의 이름표가 조명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국 상급 요원, X. 다른 요원들의 것과는 달리, 10년 이상 로스트의 요원으로서 살아 남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금테가 둘러진 이름표를 가만히 바라보던 A는 고개를 저으며 읽고 있던 자료에 시선을 뒀다.
“이번 사건 자료인가?”
관심이 있는 듯 슬쩍 보다가 말도 없이 자료를 빼앗아 가버리는. 뻔뻔한 얼굴을 한 채 자료를 읽고 있는 제 사수를 멍하니 보던 그는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계속 말을 얹어봐야 제 입만 아팠다. 아무리 대꾸를 하고 반박을 해봐도 연차라는 게 뭐라고, 금방 말려서 당해버리니. 이젠 그 의지를 잃어 금방 포기해버리는 A를 슬쩍 보던 X는 목을 울려 웃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네가 보기에 이번 사건, 어떤 것 같아?”
“웬일이십니까? 제 의견도 다 물어봐 주시고.”
“이건 뭐 물어봐 줘도 불만이네. 그냥 갈까?”
“아니…… 아닙니다.”
조금 당황해 손을 젓던 A는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갑작스러운 브리핑 요구에 머뭇거리긴 했으나, 말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제 생각으로는, 이번 일은 디펜더 놈들 소행인 것 같습니다.”
“확신 없는 건 보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뇨, 확신합니다. 맞습니다. 디펜더입니다.”
“이유는?”
그는 X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인적으로 준비해뒀던 자료들을 나열했다. 기회를 주니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은 X는 자리에 앉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더 높인 A는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들까지 정리한 파일들을 스크린 위에 정리했다.
*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온몸이 뜨거운 용광로 어딘가에 내던져진 것처럼 뜨거웠다. 후각은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내가 지금 맡고 있는 냄새가 무엇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든 그을음이 그 감각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두 다리는 멀쩡했으나 한 쪽 팔이 말썽이었다. 어깨가 빠진 건지, 아니면 아예 뒤로 돌아가버린 건지. 감각이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 팔은 포기하고 크게 소리를 쳤다.
“선배님!”
악을 쓰듯 외쳤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선 무언가 타 들어 가는 소리와 무너져가는 소리만이 가득 울렸다. 어떡하지, 이런 상황에선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극한의 생존 훈련 중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잠시 방황하는 사이. A는 흐려졌던 기억을 겨우 떠올렸다.
누군가의 초대장을 받고 폐공장을 찾았다. A의 주도로 사건을 파헤치는 중이었고, 그 편지는 이름 모를 인편을 통해 X에게 전달되었다. 필요한 모든 진실을 알고 싶으면 찾아오라는 간결한 문장이었다. 함정이겠죠, 당연히. 흰 편지지를 내려놓으며 말하는 소리에 X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는 달리 과묵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잠시 뒤에 조금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겠다. 그래야 뭔가 해결될 거야. 그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그래서 폐공장으로 향했고, 모든 방향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진입했다. 무기는 물론이고 비상 호출망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무슨 상황이 생기더라도 서로는 꼭 챙겨야 한다. X의 당부를 마음 속에 새기며 진입한 A는 총으로 정면을 겨누며 전진했다.
가동을 멈춘 기계들 사이엔 누군가 서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미간을 구기고 있으니, 신원을 밝히라는 X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내는 순순히 로브를 벗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확인한 A는 잠시 뒤 눈을 크게 떴다.
“어?”
“아는 사이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훈련생일 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실격자’라는 이름을 단 채 아카데미에서 제명되었다는 것을.
사실 아카데미 시험 중 여러 문제로 탈락되는 인물 중 일부가 디펜더로 흡수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그들을 언론 전면에 내세우며 압박의 도구로 쓰던 마빈 기업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젠 암살 집단에까지 스카우트 해가다니. 지금은 다른 지부에서 임무를 소행하고 있을 H가 듣는다면 격노를 할 만한 사실을 X에게 전달한 A는 호출기의 신호를 긴급으로 돌렸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아 신호가 가고 있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로스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물인 만큼 대비는 철저해야 했다.
“축하해. 날 밟고 이름을 달았네.”
“말은 똑바로 하지 그래. 그때 네가 내 머리를 부순 덕에 이름을 단 거지.”
“그렇긴 하네. 내 덕인데 한 턱 쏘지 그래?”
“머리에 한 발 쏴줄 의향은 있다. 지금 쏴줄까?”
지지 않고 신경전을 이어가는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 건 X의 목소리였다. 영양가 없는 싸움은 그만 두고. 정보는 어디에 있지? X의 말에 사내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X를 응시했다. 그를 바라보는 얼굴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진실을 밝히면. 누구 하나는 분명히 죽어나갈 텐데 상관 없나?”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예? 무슨 소리십니까, 원하는 거라뇨. 이건 거래가 아니라……. A가 이어가는 말은 X가 고개를 저어 막았다. A의 말이 맞았다. 계획과는 달랐다. 강제 진압을 해서라도 정보를 얻어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거래라니. 갑자기 왜? 머릿속에 늘어가는 의문에 A가 조금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그것을 알아챈 사내는 나직이 웃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뭔지 파악하려는 모양이군. 찔리는 게 많으신가 봐.”
“계속 헛소리 해대면 죽일 줄 알아.”
“죽여보시지 그래. 날 죽인다 해도 진실은 살아 남아서 언젠가 네놈의 숨통을 조일 테니.”
X는 거침 없이 사내의 발 앞에 한 발을 사격했다. 입 다물어! 이어진 호통에 커진 건 A의 눈이었다. 선배님? 나직이 흐른 말에 X는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어쩐지 조금은 서늘해진 표정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이제 모든 일이 시작될 예정이니, 일단 내 소개부터 할까?”
앞으로 질리게 볼 사이일 테니까. 그가 한 손을 들자 근거리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공장 내는 물론이고 바닥까지 울릴 정도로 큰 폭발음은 공장의 뒤편에서 들려온 것이었고, 순식간에 건물 주변으로 강렬한 화염이 일었다. 이건 아케론님의 부탁으로 플레게톤님이 특별히 하사하신 축복이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A는 재빠르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호출 완료, 안전을 위해 GPS 신호를 유지하며 현장에서 벗어나십시오. 1차적으로 신호가 갔다는 에이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 일을 지체해선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그가 권총의 잠금을 해제하자 옆에서 탄창을 빼내는 소리가 울렸다.
“내 이름은 탄탈로스.”
‘죄인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새로운 조직의 요원이지. 사내의 자기 소개 소리는 듣고 넘겨버린 A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서, 제 총의 탄창을 분리해 바닥에 내던지는 X를 발견했다.
“선배, 지금 이게 무슨…….”
“마르코스님의 명령으로, 이제부터 공들여 네놈들을 괴롭힐 거다.”
어차피 지워질 기억. 이왕이면 화끈하게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탄탈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X는 진압봉을 빼 들고 정면으로 달려갔다. 선배님! 외치는 소리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탄탈로스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X를 무던하게 지켜봤다. 그러다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발은 X를 집어 삼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다 화염에 집어 삼켜진 선배를 따라 달려가던 A는 그 여파에 의해 밀려나 크게 넘어졌다.
직접적으로 머리를 부딪혀 아득해지는 시선으로 본 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탄탈로스에게 달려드는 X의 모습이었다. 이미 녹아가고 있는 얼굴엔 이성의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얽힌 두 사람의 몸이 함께 불타는 것을 본 것이 당장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빌어먹을! 크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A는 한참 동안 혼란스러움을 거두지 못해 방황하다 생존 본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온통 불바다라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나 검은 연기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괜찮은 쪽 팔을 들어 소매로 입을 가리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너 이 새끼!”
잠시 뒤에 그를 덮친 건 녹아버린 손이었다. 불에 익어 수포가 가득 올라온. 그 수포가 터지다 못해 살이 녹아 뼈까지 일부 드러나 있는 손이 어깨를 잡아채자 A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몸을 털어냈다. 흐린 시선으로 확인한 건 이미 절반이나 녹아버린 탄탈로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복수심으로 마지막 힘을 끌어내 전투를 이어갔다. 탄탈로스가 살아있다는 건 X가 실패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성치 않은 몸으로 제 손에 묻어나는 탄탈로스의 진물과 피부를 대충 털어내며 전투를 이어갔다. 다행히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팔 부상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멀쩡한 그를 전신 화상을 입은 탄탈로스가 이겨낼 리가 없었다. 빼든 진압봉으로 물러진 머리를 반쯤 부숴 복수를 한 A에 의해 다시 불구덩이로 밀려나기 전, 기괴하게 웃은 탄탈로스는 다 쉬어빠진 소리로 말했다.
“보이는 것만 믿지 마, 너희도 우리와 다를 바 없으니까.”
A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다 기어서 그곳을 겨우 탈출했다. 탈출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계속해서 X의 흔적을 찾았으나 보이는 것이 없었다.
흙바닥 위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 쉰 그는 화마에 집어 삼켜져 무너져가는 공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흐려져가는 의식 너머로 들리는 지원 요원들의 소리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으며 그렇게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