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죄인들Chapter 21/ 스쳐 지나가다

관리자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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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지졸. 피가 흐르는 팔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지고 있음에도 얼굴에 드리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난전 속에 팔을 스친 총탄 하나가 이렇게도 과한 출혈을 일으킬 줄이야.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참 악당들 같다고. H는 은연 중에 생각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몸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몸을 숨긴 숲 속의 온도 때문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미 흙에 넓게 퍼진 제 피웅덩이를 바라보는 눈에 아쉬움이 감돌았다.


“H!”


멀리서 뛰어오는 머리칼이 하얬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탈색을 한 것처럼 희게 물들어버린 머리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D의 등엔 저격 소총이 매달려 있었다.

에리스. 불화의 여신. 자신을 축제에 초대하지 않아 황금사과를 두고 떠났고, 그 황금사과는 세 여신의 싸움 거리가 되어 결국엔 최악의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승부욕에 의한 공정한 대결을 의미하면서도 지독한 불화를 뿌리고 다니는 여신의 이름을 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디펜더는 태생적으로 규율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조직이었다. 절대 권력인 마르코스 로스 휘하의 모든 요원들은 대등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흔히 ‘네임드’라고 부르는 몇 요원들과 그들을 직접 캐스팅하고 가르친 ‘간부급’ 요원들 역시도 적을 파악하기 위해 임의로 짜둔 권력도에 오른 이름들이었을 뿐이었다. 잔혹하고 오만한 자들이 가득한 무리 내에 규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가장 위험한 허점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약점을 건드렸다. 저승에 흐르는 여러 강 중 비통을 상징하는 아케론의 부하들인 죄인들. 탄탈로스, 익시온, 시시포스. 이 셋에겐 상하관계가 없었다. 죄인들이 비교적 최근에 스스로 이름 붙여 움직이는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피아 구분 없이 제 욕구를 위해 잔혹한 살육을 즐기는 탄탈로스와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허영심에 휩싸여 있는 익시온,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이가 매번 바뀌어 안정성으로는 가장 낮으나 젊은 피에 속하는 시시포스, 이 셋의 조합은 어떻게 해도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대표자’라는 단 세 글자에 세 사람은 분열을 일으켰다. 가장 앞장 서 나와 있던 익시온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이 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던 탄탈로스 역시도 못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가장 잠잠했던 것은 시시포스 였으나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은근슬쩍 H와 눈을 마주하며 자신이 가장 이성적이고 대화할 만한 인간임을 어필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라니. 가관이네. 입수한 첩보와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이고, 내가 말실수를 했나? 일부러 A의 흉내까지 내가며 능청스럽게 흘린 정보는 그들 사이의 신뢰를 더 빠르게 무너뜨렸다. 너 이 새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탄탈로스가 크게 소리치며 가리킨 손가락 끝은 시시포스를 향했다. 여전히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는 그를 향해 이 와중에도 정보를 흘리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던 탄탈로스가 한 발을 내딛었고, 그 순간 어딘가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그들 앞에는 홀로그램을 내세우고 먼 거리에서 은신하고 있던 D의 총알이었다.

총탄이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않은 탄탈로스는 그대로 로브 속에 숨겨 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그 뒤는 앞서 말한 대로 오합지졸들이 벌이는 아수라장이었다. 직접 무기를 들어야 하는 탄탈로스의 모습을 비웃던 익시온은 이미 기계로 대체된 신체 내에 동력을 소비하는 총기가 들어 있었기에 전면으로 탄을 쏟아 냈고, 노트북을 들고 있던 시시포스는 싸움에 휘말리기 싫었는지 몇 걸음 물러서 있다가 제 노트북이 새어나간 총탄에 박살 나는 것을 목격하고 참전했다. 그의 무기는 EMP였다. 소형으로 만들어 둔 EMP가 터지자 가장 먼저 익시온이 무력화 되었고, 잠시 멈칫한 탄탈로스는 그대로 익시온을 때려 눕히고 시시포스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현장에 나와 있는 것으로 위장하고 있던 D의 홀로그램이 EMP에 맞아 없어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H의 상처는 잠시 의식을 되찾았던 익시온의 작품이었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몸의 모든 부위를 개방한 그는 가동 정지를 각오하고 전방향으로 총탄을 쏟아냈고, 그 징조를 눈치채고 밖으로 피신하고 있던 H의 팔을 맞췄다. 평범한 탄알이었다면 제압이 가능한 수준의 상처였을 테지만, 익시온이 사용하는 탄 종류는 사람의 살을 집요하게 파열시키는 능력이 있었기에 혈관들을 제대로 건드리고 지나갔다.

D는 의식을 잃어가는 H의 상태를 살피다 급한 대로 셔츠의 밑단을 찢어 상처 부분과 그 위를 묶었다. 당장의 기본적인 지혈은 가능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가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D는 별다른 고민 없이 H를 일으켜 세웠다. 계속해서 축 늘어지려는 몸을 부축하며 걸어갈 때마다 흙바닥 위엔 짙은 발자국들이 남았다.


*


배기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급하게 노후 된 차를 구한 탓도 있었으나, 그런 차가 웅웅 울릴 정도로 세게 밟은 가속페달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다 놈들을 만나기 전에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후배를 조수석에 앉힌 A의 귀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있다. LOST란 조직 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아주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떠오른 기억 속 자신의 직속 사수인 요원 X의 성품과 행동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상부에 밉보일 거리라고는 식비 제한을 없애 달라는 제안을 끈질기게 요구하다 잠시 상부와의 연락 수단을 전부 빼앗겼던 것뿐이었다. 게다가 적을 섬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사람에게 그런 취급이라니. 빠르게 줄어드는 요원 H 신호와의 거리를 꾸준히 확인하면서도 떠오르는 잡념을 잊을 수 없었기에 그의 현실 감각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그때,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에서 들리는 것인 줄 알고 듣고 넘겼으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Q가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잡은 A의 팔을 두드렸다.


“혹시 추적기 가지고 오셨어요?”

“뭐?”

“추적기요! 제가 만들어 드렸던!”


아. 그제야 한동안 셔츠 안쪽에 놓여 그 존재를 잊었던 추적기의 존재를 깨달은 A는 품을 뒤적여 그것을 Q에게 건넸다. 추적기는 꽤 요란하게 울리며 붉은 등을 계속해서 점멸하고 있었다. Q는 그것을 곧장 제 팔에 연결했다. 타겟이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귓가에 곧장 울려오는 알림에 눈을 크게 뜬 그는 주변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폈다.


“지부를 공격했던 놈이 근처에 있어요.”

“확실한 거 맞아?”

“지금 제 능력을 의심하시는 거예요?”

“너무 갑작스럽잖아.”


동료를 찾으러 가는 길에 신호가…….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말을 이어가던 A는 별안간 무언가를 깨닫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H가 죄인들과 만났다면? 그리고 모종의 이유에 의해 지부를 공격한 놈이 이동하고 있는 거라면? 그 생각이 이어지기 무섭게 추적기의 신호음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반대 차선이었나 봐요! 신호음이 급하게 빨라졌다가 빠르게 끊어진 점을 토대로 추측한 Q가 뒤편을 바라보자 A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놈을 놓칠 것인가. 아니면 동료의 생사를 확인하러 갈 것인가. 또다시 중대한 갈림길에 놓인 그는 핸들을 쥔 두 손을 꽉 쥐었다.


*


“H!”


공허한 실내에 A의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메아리치며 퍼지던 목소리는 금방 자취를 감추고 그에게 침묵만을 안겨주었다.

A는 차 안에서 선택을 했다. 적을 해치우는 기회는 언제든지 확보할 수 있으니 생사를 알기 힘든 동료부터 찾자고. 그래서 H의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에 도착했으나, 찾고자 하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함께 사라졌다는 D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건물 뼈대에 가득 박혀 있는 총탄의 흔적과 무언가 부서져 나간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현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A가 어떤 기계 부품의 조각으로 보이는 것을 집어 들어 관찰하고 있을 때쯤. 임시 키트로 혈흔들을 확인하고 있던 Q가 급히 숨을 집어 삼켰다.


“무슨 일이야.”

“저, 그게…….”


창틀 방향으로 나있는 혈흔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Q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손에 들린 임시 키트엔 일치율 99.9%라는 수치가 떠있었다. H의 피인가? A가 묻는 소리에 Q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하기는 싫지만 출혈량이 꽤 된다고. 뒤이어 혈흔에 반응하는 빛을 쭉 비춰가며 H가 기대어 있던 숲 속의 나무 앞까지의 네비게이션을 전개한 그는 조금 침울해진 표정으로 장소를 둘러봤다.


“시신은 없잖아.”

“그렇긴 하죠.”

“그럼 안 죽었어. 그건 내가 잘 알아.”


누군가가 H를 죽게 두지 않았으니까. A는 물기를 머금고 있어 거센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은 두 쌍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황상 D일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


차체가 거침없이 들썩였다. 과속 방지턱을 거의 무시하고 내달린 탓이었다. 이러다 도착하기 전에 차부터 박살 나겠다고. 미간을 구긴 사람은 제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총탄을 맞아 입력 부분과 화면의 절반을 잃어버린 노트북이었다.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던 그것을 이리저리 만지던 그는 곧 멀쩡한 화면 부분에서 가동을 시작한 노트북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고,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며 편히 고개를 늘어뜨렸다. 바로 아래에 스페어 타이어를 놓는 공간이 있어 소리가 울리는 감이 있었으나 트렁크 안도 꽤 있을 만한 편이었다. 이젠 노트북의 빛까지 어둠을 거둬주니 남은 것은 깜짝 등장뿐이었다.


- 네 OO병원 응급실입니다.

“곧 팔에 심한 총상을 입은 위급 환자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혈액형은 RH+ O형. 출혈량이 너무 심해서 수혈부터 해야 합니다.”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 테니 빨리 준비 부탁 드려요. 빠르게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는 목소리가 차 내부의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시시포스는 천천히, 소리 나지 않게 움직여 벽에 난 작은 문 하나를 슬쩍 열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두 명의 모습이었다. 조급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흰 머리칼의 여성과, 이미 의식을 잃어 고개를 축 늘어 뜨리고 있는 또 다른 여성. 그는 입 새로 비집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담으며 다시 문을 닫았다. 기대감이 역력한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고 있었다.